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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원전문가칼럼

영구채와 에버그린펀드 (한영혜 공인회계사)

by 삼일아이닷컴 2025. 8. 6.

객원 전문가 칼럼니스트 "한영혜"

공인회계사/보고펀드자산운용CFO

영어에 옥시모론(oxymoron)이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모순어법이라고 번역되며, 상반되는 의미를 가진 두 단어가 결합하여 강렬한 의미를 가진 새로운 단어가 된다. ‘차가운 열정,’ ‘소리없는 아우성,’ ‘달콤한 이별,’ 그리고 ‘공공연한 비밀’ 등이 이러한 옥시모론이다. 생각해보면 ‘모순’이란 단어 자체도 ‘서로 뚫을 수 없다는 창과 방패’를 동시에 파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니 흥미롭다.

‘영구채(Perpetual Bond)’라는 금융상품이 있다. 일반적으로 채권은 갚아야 하는 기한, 즉, 만기가 존재하고 이러한 만기는 채권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다. 그런데 ‘영구채’라는 특수한 채권은 만기가 없다. 만기가 없으니 상환의무도 없다고 할 수 있고 발행회사는 영구채를 회계상 자본으로 계상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자본으로 발행하지 않고 굳이 채권의 형태를 가진 영구채를 발행하는 걸까?

영구채는 이론적으로는 만기가 없으나 형식적으로는 예를 들면 30년 만기로 표시되어 발행하였다가 만기를 계속 연장하는 것이 가능하다. 영구채는 장기채권으로 취급되어 발행시에도 일반 채권보다 높은 금리로 발행되는데 일정 기간이 지나면 스텝업(step up)이라 하여 가산금리가 적용되며, 이러한 고금리부담을 피할 수 있도록 발행자에게 조기상환 기간(예를 들면 5년) 내에 조기상환권(콜옵션)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방식으로 영구채는 주식과 달리 고금리로 일정한 현금흐름을 제공해주므로 채권투자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영구채를 발행하면 경영권 희석 이슈나 높은 자본비용을 수반하는 주식을 발행하지 않고도 장부상 자본으로 계상할 수 있고, 영구채의 이자는 회계상으로는 당기순이익 항목인 이자비용이 아닌 배당으로 표시되어 당기순이익을 높일 수 있는 반면 세무상으로는 이자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으니 영구채 발행에 이점이 있다. 다만 영구채에 부여하는 고금리 지급 및 추가 고금리를 피하기 위한 중도상환으로 인하여 실질적인 회사의 현금흐름은 악화될 수 있으니 영구채 발행이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 또한 회사에 부여된 조기상환 콜옵션은 권리이므로 회사가 상황에 따라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영구채 발행회사가 관행적으로 조기상환을 해왔고 또 투자자의 기대도 그러하므로 회사가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으면 뭔가 회사의 재무상황이나 신용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실제로 콜옵션 행사 기간 중 금융시장 불안으로 촉발된 차환금리가 스텝업 금리보다 높아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가 이를 금융시장에서 채무불이행으로 받아들여 전체 금융시장에 후폭풍을 가져올 뻔했던 사례가 있었기에 회사가 영구채를 발행할 때는 이런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한편, 투자자가 직접 투자하는 주식에는 만기가 없지만 투자자의 자금을 모아 투자하는 펀드에는 투자자의 자금을 돌려줘야 하는 ‘만기’가 존재한다. 물론, 만기 중에 언제든지 해지하고 중도에 가입할 수도 있는 개방형 펀드의 경우 특별히 펀드 만기가 주는 의미는 없고 이에 따라 펀드만기를 별도로 정하지 않기도 하지만, 한번 투자하고 나면 정해진 펀드 만기까지 해지할 수 없는 폐쇄형 펀드라면 투자자에게든 펀드의 운용자에게든 만기가 주는 의미가 클 수밖에 없다.

주로 장기로 자금을 운용하는 보험회사들의 경우 장기 운용에 따른 수익성과 안정성 제고를위하여 전통적 자산인 주식, 채권 이외에 인프라, 부동산 등의 대체자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인프라나 부동산 등은 장기 투자수익율은 높지만 주식, 채권처럼 단기 매각이 쉽지 않아 유동성이 없는 비시장성자산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이러한 대체 자산을 펀드를 통하여 투자하는 경우에 펀드 만기가 되면 만기에 맞춰 투자자에게 유리하지 않은 조건으로 대체 자산이 매각되어 투자자금을 상환 받게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원치 않는 투자손실이 확정될 수도 있다.

물론 개별 펀드의 만기 연장을 통해 이러한 문제점을 일부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궁극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펀드 만기’라는 개념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현재 자본시장법에서는 펀드 만기를 무한대로 설정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규약으로 펀드 만기를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개방형 펀드의 경우 펀드 만기를 별도로 정하지 않는다고 규약에 넣어도 펀드 판매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 자본시장법에서는 유동성이 없는 비시장성자산에 대한 투자비중이 50%이상인 경우 개방형 펀드로 설정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니 대체자산에 주로 투자하는 펀드는 개방형 펀드로 설정할 수 없다. 한편, 현행 자본시장법상 사모펀드의 경우 폐쇄형 펀드의 경우에도 만기설정의무가 배제되고 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펀드자산의 가중평균 만기 대비 펀드 만기가 짧은 경우 펀드설정을 제한하는 등 펀드 만기에 대한 여러가지 규제가 살아있다.

‘에버그린펀드(Evergreen Fund)’는 영구폐쇄형펀드라고 불리며 규정된 만기가 없어 투자자의 투자 중단이나 펀드 청산의 요청이 없는 한 영구적인 투자 기간 하에 재투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투자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물론 투자 기간 동안 투자자의 유동성이 필요할 수 있으므로 부분 환매나 펀드청산 요청을 허용하여 투자자가 원하는 시기에 투자금액을 회수할 수 있게 한다. 대체자산에 대한 펀드 투자가 활발한 해외에서는 이러한 에버그린펀드 구조를 허용하여 지속적인 재투자 및 투자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다양한 투자자들의 투자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 국내에서도 장기로 자금을 운용하는 보험회사 등 장기투자자들의 활발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이러한 에버그린펀드가 필요하다고 한다.

옥시모론처럼 모순되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고 과거에는 상호 공존이 불가능했던 것들이 함께 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기존의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지 않고 기존에 있던 틀을 깨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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